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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뉴스 |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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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 청주 작성일13-09-06 18:43 조회3,0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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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까지 ‘바보 만들기’에 매달려야 할까

-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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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은 점묘화 같은 책이다. 짤막짤막한 간결체 문장으로 이어진…. 점묘화가 점에 초점을 맞출수록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모호하듯, 부분 부분의 문장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볼수록 형체가 드러나는 점묘화처럼 읽어갈 수록 의미의 형체가 짚인다.

<무지한 스승>은 잘 씹어야 하는 책이다. 죽이나 수프가 아니라 고두밥이나 눌은밥 같은 책이다. 공들여 씹지 않으면 잘 넘어가지 않지만, 씹을수록 맛이 우러난다.

<무지한 스승>은 답답하고 고통스런 책이다. 결코 말랑말랑한 내용이 아니어서 읽어내기 버겁기도 하지만 읽는 내내 우리교육의 모습이 겹쳐 떠올라 더욱 고통스럽고 답답한 책이다.

그러나 <무지한 스승>은 형광등 같은 책이다. 불이 들어오기까지 예열과정이 굼뜨기는 하지만 켜지면 더 환해지는…. 책을 읽고 난 뒤 머리위에 형광등의 스타트전구처럼 깜빡거림이 이는 듯했다. 만화에서 뭔가 착상이 떠오르는 장면에 ‘머리 위에 점등’표식을 그리듯, 내 머리 위에도 깜박거리다 켜지는 형광등을 그리고 싶었다.

 

[ 자코토의 믿음 ]

 

‘무지한 스승’이라고? 자크 랑시에르의 이 책은 그렇게 제목부터 뜨악하다. 차라리 ‘무식한 선생’이라면 있을 법도 한 찌질한 선생쯤인가 싶을 텐데, 이건 뉘앙스가 다르다. 아는 것 없는, 그런데 ‘스승’이라…. 역설인가? 어쨌든 일반상식으로는 형용모순이다. 아니 언어도단이다.

저자 랑시에르는 조제프 자코토라는 거의 2백 년 전 인물의 해묵은 이야기를 들추어내서, ‘전통적 교수방법 뒤집기’라는 지적모험으로 들어선다. 네덜란드어도 모르는 채로 네덜란드 학생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했던 프랑스어 강사 자코토.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 책 한권을 던져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놀랍게도 다들 프랑스어를 배워낸다. 뜻밖의 결과에 자코토도 놀란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승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자기 학식을 전달해서 그 수준만큼 끌어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니,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다. 더 이상 진진한 이야깃거리도 없다. 다만, 그로부터 자코토의 입을 빌린 랑시에르의 ‘지적 해방’에 대한 논변이 작달비처럼 쏟아진다. (상황 제시밖에 없는 단순한 소재로 한권 분량의 ‘요설(?)’을 쏟아내는 ‘프랑스 지성의 이빨’이라니~!)

네덜란드 학생들로 하여금 강사의 설명 없이도 프랑스어를 익히게 한 지능은 그들이 모국어를 익힐 때 썼던 그것이었다. 우리도 이렇다 할 가르침 없이 우리말을 배웠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뭔가를 익히고 학습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배우려고만 하면 자기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속에서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서 배운다.

교사의 설명은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인가? 설명은 무한 퇴행의 원리를 내포한다.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일 뿐이며 학생을 열등한 존재로 전제하는 ‘바보 만들기’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그렇다면 스승은 전연 필요 없는 존재일까. 그건 아니다. 자코토도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가르침을 주었다. 학생들을 ‘혼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고리’ 안에 가두고, 학생들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씨름하게 만든 가르침. 하나의 지능이 다른 지능에 종속되는 것이 ‘바보 만들기’라면, 한 지능의 행위가 자신의 지능에만 복종하는 것이 지적 해방이다.

구식(전통적) 교육에서 유식한 스승은 학생 스스로 얻는 지적역량의 증가를 자기학식의 가치절하로 받아들인다. ‘하나를 듣고 열을 안다(聞一知十)’는 것도 동양고전(논어) 속의 별난 사례일 뿐, 보편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다시 말한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명도 없다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보편적 가르침은 개인을 지적해방으로 이끈다. 모든 이들은 스스로만 해방될 수 있다. 가르치는 자는 필히 자신이 먼저 해방되어야 하며 그것이 보편적 가르침의 필요조건이다. 그 지적 해방의 혜택을 다른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돕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고 있다. 자코토는 “자연의 빛(인간의 이성)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고 한 데카르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적 주체’라는 생각을 끌어냈다.

스승이 주도하는 설명 위주의 구식 교육으로는, 학생은 결코 스승을 따라잡을 수 없다. 구식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앵무새처럼 외기만 하고 가슴으로 익히지 않는다. 그러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은 하늘이 내린 경우에나 가능할까.

구식 교육은 불평등을 먹고 산다. 지적능력이 불평등해야 유식한 자가 무지한 자 위에 군림할 수 있지 않는가. 불평등한 것처럼 보이는 지적능력의 차이도 실은 지적발현의 불평등일 뿐이건만.

이러한 지적혁명의 과정에 장애물 또한 당연히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무시의 늪’이다. 무지한 자들에게 무지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스스로는 익힐 수 없다고 믿는 ‘자기무시’다. 그리하여 랑시에르의 지적 해방은 말 그대로 무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이다.

 

[ ‘알기’ 와 ‘알게 되기’ ]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앎’이란 무엇인가를 되짚게 된다. ‘안다’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서도 다양한 의미망을 갖지만, 주된 풀이는 이렇다. 알다 : ①(사람이 사실이나 대상을)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거나 깨닫다. ②(사람이 상황이나 대상을)교육이나 경험, 사고를 통하여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생존의 주된 무기가 ‘머리’인 인간은 ‘앎’을 경쟁의 도구로 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스스로’ 아는 경우와 ‘남의 도움의 받아서’ 아는 2가지 경우가 있다. ①과 같은 감지(感知)력은 스스로 계발되는 부분이 크다. 그러나 ②의 경우, 경험과 사고를 통한 인지(認知)는 스스로도 가능하지만, 교육을 통한 지적능력의 습득은 ‘먼저 아는 이(先生)’의 지도를 받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것이 교육의 필요성이요 존립 근거이기도 하다.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교육방법은 고전의 전수(傳授)가 기본이었다. 선현의 지혜를 먼저 습득한(유식한) 스승(先生)이, 그것을 모르는 제자에게 쉽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 그래서 가르칠 내용도 가르치는 방법도 스승이 아는 범위 내였다.

가르침의 주된 도구는 말이다. 물론 말만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배울 것이 말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이끄는 것도 말이므로, 그 소통의 도구 없이 가르침이 이뤄지기 어렵다.

그러면 말(설명)을 통하지 않고는 정말 교육이 불가능한가? 예를 들어 벙어리 교사가 그림이나 음악이나 체육을 가르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우리가 아무 말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국어를 익혔듯이, 외국어나 음악, 심지어 수학을 배우는 것 역시 모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자코토는 믿는다.

인간이 축적해온 지식과 정보는 컴퓨터에 기계적으로 집적된다. 그것의 정확성과 용량, 그리고 정보처리 속도는 이미 인간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런 컴퓨터에게도, 답하는 데 가장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바로 자신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컴퓨터가 풀지 못할 문제는 집적해놓은 정보가 없는 문제다. 그걸 알아내려면 집적된 정보를 모두 검색해본 연후라야 “정보가 없어 답하지 못 한다”는 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처럼, 인간도 자기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메타인지’를 말했던 것 아닐까.

 

[ 스스로 공부하기 ]

 

자코토의 교육관은 현대 인지발달이론들보다 훨씬 앞선 깨우침이었던 셈이다. “아동은 세상에 대해 스스로 학습해 나가는 독립적인 발견자”라는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과, “인지발달은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며, 도와주면 더 잘 자란다”는 비코츠키의 근접인지발달이론들도, 자코토식 믿음이 이어진 것이다.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우리교육에서도 ‘스스로 하는 공부’, ‘자기주도학습’들을 말끝마다 입에 올리긴 한다. 그러나 교육현장에는 여전히 ‘주입식 내리먹이기’가 가장 손쉽고 효과가 빠른 지도법으로 통용된다. 게다가, 들볶고 쥐어짜고 닦달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에겐 매를 들어야 효과가 있다는 ‘초달교육’의 미련조차 남아있다.

필자는 스웨덴의 ‘푸투룸(Futurum)’이라는 미래형학교를 방문했을 때 ‘자기주도학습’의 전형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학생들이 매일 아침 등교해 자기주도의 개인시간표(logbook)를 짜고 일과를 ‘스스로 학습’으로 엮어나간다. 모든 공부가 미술학원(화실)들에서 그림을 배우듯 하는 형태였다. 그림 그리기는 자기 손으로 직접 하지 않고는 익혀지지 않는다. 교사는 이따금 봐주며 코칭만 할 뿐. 그런데, 우리교육의 대부분은 (교과를 막론하고) 군대의 제식훈련처럼 이루어진다. 태권도학원의 품세지도처럼 일제교육 일변도이다.

 

[ ‘바보 만들기’ 경쟁과 우리교육 ]

 

읽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읽어갈수록 우리교육이 끊임없이 ‘바보 만들기’의 수렁으로 돌진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특히, ‘구식의 승리’편을 포함한 제5장을 읽으면서 우리 현실이 오버랩 되어 갑갑했다.

“구식은 학원들과 시험, 설명하는 제도의 견고한 토대에 대한 경영과 사회적 비준의 권력을 맡는다. …구식은 자신의 오래된 왕홀을 어느 것에도 양보하지 않는다. …구식은 자신을 위해 중학교, 대학교, 예술학교를 유지한다. …구식은 다른 것들에게는 자격증만을 준다. …구식은 그들에게 자격증이 이미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을 믿는다.”

그런데 이런 구식의 승리를 공고히 하는 데, 공교롭게도 ‘진보주의자’들의 한계가 기여한다. 지적해방의 관념에 박수를 보내던 진보론자들이 ‘새로운 교수법’과 같은 구식의 변장술에 휘말려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진보는 불평등의 새로운 방식이요 지배적 구조인 설명의 대열(서열)에 편입되는 것이다. 진보적 교육학이란 것도, 설명을 개선하는 ‘점진’이란 것도, 불평등을 ‘지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런 교육을 통해 학생은 스승을 결코 따라잡지 못하며 인민은 결코 엘리트를 따라잡지 못한다.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좋은 길로, 즉 개선된 설명의 길로 나아가게 해 준다. 진보의 세기는 승리한 설명의 세기, 애 취급된 인류의 세기다. 이것이 구식의 승리, 제도화된 불평등의 절대적 승리다!

우리 교육의 ‘일등주의’가 겹쳐진다. 너도나도 베스트원(Best1)•넘버원(No.1)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회는 아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회다. 그렇기에 모든 학생들에게 그것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기거나, 되어야 한다고 강박하는 것은 당연히 기만이다.

하지만 모두가 될 수 있는 일등도 있다. ‘온리원(Only1)’이 되는 것. 자기만의 특별함을 스스로 일구어, 개성으로 빛나는 독특한 자신. 그러한 온리원은 누구와 비교하거나 꺾을 필요도 없기에, 누구든 될 수가 있다.

 

[ ‘지적 해방을 자극하는 교육’을 꿈꾸며 ]

 

이 책을 버겁고 고통스럽게 읽고 나서, 썩 개운치는 않지만 머리 한쪽에서부터 형광등의 스타트 전구처럼 깜빡거림이 이는 듯하다.

자코토의 제자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자코토의 방법’을 가르치는 강사나 설명자가 되는 제자들과, 스스로 ‘해방하는 자’가 되는 제자들. 자코토는 어느 경우를 더 반겼을까. “보편적 가르침을 받았으나 해방되지 않은 1억 명의 식자들보다 무지하지만 해방된, 바로 그 한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자코토의 속삭임이 다시 귀에 들리는 듯하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네.”

모두의 학습능력이 평등하다는 믿음 아래 각자 지적 해방을 추구하고, 또 서로의 지적 해방을 자극하는 사회. 그런 사회의 도래가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책의 끝머리에 덧붙여놓은 ‘자코토의 예언’은 그에 대한 저항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비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기에.

요즘, 그가 꿈꾸었던 ‘평등교육’, ‘보편적 교육’이 북유럽 나라들에서 부분적으로 구현되면서, 특히 ‘미래형 교육’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앞서 갔던 자코토(혹은 랑시에르)가 너무 완고한 (구식교육 체제의)기득권적 저항 앞에 조금 지쳤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충북교육발전소(http://cafe.daum.net/cbedufactory )펌글-

- MI미디어 대표 정철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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